왜 몰랐을까? (누가복음 24장 13-35절)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는 종교 개혁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로만 카톨릭으로부터 극심한 반대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너무나 지쳐서 밤에는 잠도 잘 못 이루고, 밥도 잘 못 먹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가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보니 집 안에는 온통 검은 천이 드리워져 있고, 부인도 검은 상복을 입은 채 슬픈 표정으로 촛불 하나 켜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가 묻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소?” 아내가 대답합니다. “네, 아주 귀한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루터가 다시 묻습니다. “누가 돌아가셨소?” 그러자 부인이 “하나님이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루터는 너무나 황당해서 소리칩니다. “아니 그런 불경스러운 말이 어디 있소? 살아계신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무궁하신 분이고, 부활의 주님이 지금도 살아있는데 어떻게 감히 하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수 있소?” 그랬더니 부인이 정색을 하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하여 확신하는 분이 왜 하나님이 안계신 것처럼 요즘 그렇게 우울해 계십니까? 요즘 당신을 보면 하나님이 죽은 것 같습니다.” 루터가 이 말을 듣고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늘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삶에는 이 부활의 주님이 안계신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 두 명이 힘없이 엠마오로 가고 있습니다. 엠마오는 예루살렘에서 30리 정도, 즉 한 11km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마을입니다. 이 두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하고 실망한 마음으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엠마오까지 가게 되는데, 너무나 황당한 것은 그들의 대화의 주제는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정작 자기 옆의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 봤을까요? 왜 몰랐을까요? 첫째, 다른 모습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전과는 다른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부활의 모습이 어떠할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 몸으로 부활합니다. 하지만 그 몸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썩지 않으며(고전 15:52-53), 하늘에 속한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고전15:40). 그리고 주님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고전15:43). 우리의 부활은 막연한 사후 어떤 상상속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실제적이며 우리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준비된 사실입니다. 둘째,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1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무엇에 눈이 가려져 있었을까요? 절망과 낙심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절망과 낙심은 너무 커서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이성과 상식에 눈이 멀어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아는 상식과 경험으로는 두 눈으로 확인한 주님의 죽음이 너무나 확실하여, 그 분이 살아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셋째, 무딘 믿음 때문입니다(25). 본문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25) 제자들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부활하실 것에 대한 가르침도 받았고(막8:31), 부활의 주님을 빈 무덤에서 확인한 여인들의 증언도 들었습니다(눅24:8,9). 믿음이 없이는 부활 신앙을 가질 수 없습니다. 목장 나눔 질문: 부활의 주님을 알지 못했던 두 제자의 모습에서 깨닫게 되는 교훈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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