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원하시는 헌신
(누가복음 10장 38-42절)
어떤 사람은 함께 일하면 행복한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함께 일하면 불편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안하고 함께 앉아만 있어도 마음이 편하고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함께 앉아 있으면 너무 불편해서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리를 피하고 싶은 사람이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서로 궁합이 안 맞는다고 말합니다. 즉 선천적으로 안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이것은 타고난 성품의 문제라기 보다 서로에 대한 배려의 문제이며, 예의의 문제이고, 함께 하고자 하는 동반자로서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이런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교회 밖의 사람들 눈에 그리스도인이 왠지 불편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죠. 왜 그리스도인이 불편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왜 그리스도인은 함께 있기만 해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 회복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지 못할까요? 그리스도인이 다가오면 이질감을 느끼고, 괜히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이 되어버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물론 세상이 악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밉게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미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우리가 미움을 받는 이유가 누군가를 배려하지 못하고, 무례하고, 이기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가 좀 더 진지하게 우리의 삶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의 헌신이 저들에게 광신으로 보이는 것이 아닌 사랑하고 섬기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세상이 부러워 할 그런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열심히 헌신하는 것도 좋지만 바른 자세로 헌신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예수님은 마르다의 초대를 받아 마르다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마르다는 당연히 주님을 잘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분주하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동생 마리아는 너무 철없이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 사랑을 혼자 다 독차지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가서 탓을 합니다. “왜 그냥 두십니까? 마리아에게 가서 도우라고 말해주세요.” 그때 주님이 마르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우리는 마르다의 모습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열심히 섬기고 봉사는 하지만 기쁨을 잃어버림으로, 오히려 그 열심이 주위를 불편하게 만들고 심지어 주님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모습이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섬겨야 할까요? 주님이 원하시는 헌신은 어떤 헌신일까요?
첫째, 목적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초대해 놓고 너무 분주한 나머지 자기가 왜 예수님을 초대했었는지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본래의 목적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는데, 준비하면서 오히려 예수님을 탓하고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헌신은 목적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은혜가 먼저입니다. 일이 먼저가 아닙니다. 은혜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은혜 속에서 섬겨야 합니다. 오래 섬기고 바쁘게 섬기다 보면 원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불평과 원망의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먼저 은혜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누구를 위한 헌신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헌신이 항상 주님과 교회만을 위한 헌신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때로 그 헌신이 내 자랑과 만족을 위한 헌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르다가 주님께 마리아를 꾸짖으라고 한 것은 반대로 자기의 공을 알아달라는 투정이 섞여 있는 것입니다.
넷째,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하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망각하게 됩니다. 자신감을 잃게 만들고, 우리에게 열등감을 가져오게 합니다. 비교는 지나치면 교만이 되고, 부족하면 열등감에 사로 잡히게 합니다. 비교를 멈추십시오.
목장 나눔 질문: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을 위해 내가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