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 감사를 배우라
(하박국3장 17-19절)
추수감사절의 기원은 구약 성경에 나오는 감사절에 있으나, 추수감사절의 유래는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에게서 찾습니다. 1620년 미국에 정착한 청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항해를 하여, 무려 65일 동안 힘겨운 항해를 하여 지금의 미국에 도착합니다. 마실 물과 양식이 부족했고, 험한 파도와 폭풍이 배를 집어삼키려고 하였지만 모든 것을 믿음으로 이기고 신대륙에 도착한 그들은 다행히 호의적인 인디언들을 만나서 농사기술을 배우고 이듬해 가을에는 얼마간의 옥수수와 호박과 감자를 추수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원주민들을 초대해서 함께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 있는 추수감사절의 첫번째 풍경입니다. 그들은 첫번째 추수감사절에 7가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첫번째 추수감사절에 드린 감사는 평안, 형통, 축복이라는 환경이라서 드려진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고난과 고생, 눈물과 죽음이라는 척박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렸던 절대 감사의 모습이었습니다.
절대 감사하면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여순반란 사건 때 공산당에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습니다. 그리고 그 장례식에서 10가지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감사만큼 놀라운 일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기념 전시실에 들어가 보면 두 아들의 장례식 후에 주일에 드린 감사헌금 봉투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두 아들의 순교를 감사하며’라고 기록되어 있고, 일금 ‘일만원’이라고 적혀 있다고 합니다. 당시 손양원 목사님의 한달 사례가 80원이었는데, 만원은 무려 10년치의 사례비를 감사로 드린 것입니다. 이 감사헌금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 의미는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절대 감사인 것이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상대적인 감사나, 조건적인 감사가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절대 감사를 말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절대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하박국 선지자가 드린 감사의 찬양 내용이 나옵니다. 이 시대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시대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악인들이 형통하고 의인들이 고난을 받는 그런 시대였고, 밖으로는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이 서서히 압박을 해오며, 일차, 이차, 삼차에 걸쳐 침공해 와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소망 없는 시대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시대를 6가지의 ‘없다’(결핍)로 표현합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올리브나무에 딸 것이 없고, 밭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다’. 절대 결핍이죠. 그런데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18) 과연 이런 절대 결핍의 상황 속에서 감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이런 절대 감사를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 주 안에 있을 때 감사할 수 있습니다. 18절에 하박국 선지자는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라고 고백합니다. 절대 감사는 주안에서 느낄 수 있는 감사입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 있으면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지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절대 감사는 우리를 절대적으로 사랑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릴 수 있는 감사입니다.
둘째,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련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없어도 구원의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하면 모든 것을 가져도 아무 소용없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님이 힘주심을 인해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낙심이 되고, 실패한 것 같은 삶 속에서 힘주시는 하나님을 인해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만 생각하면 힘이 난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보며, 환경을 보면 힘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환경에서든 하나님을 바라보면 힘이 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힘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목장 나눔 질문: 내 삶속에서 절대 감사를 실천하기 위하여 하박국 선지자에게 배울 점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