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이유
(로마서 6장 1-14절)
고등학교 점심시간에 한 친구 녀석이 소리칩니다. “누구 반찬 부족한 사람?” 그랬더니 몇몇 친구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나” “나” 그러자 처음 질문한 친구가 다시 소리칩니다. “그러면 밥 남은 것, 나 좀 줄래?” 반전이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은 은혜로 받은 구원이나, 값없이 주신 구원에 대하여 이해할 수도 없었고 받아들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런 말장난 같은 질문을 하였던 것입니다. 즉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말이 되느냐?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지 않고, 은혜로 구원 받는다면, 은혜를 받기 위해 죄를 지어야 한단 말이냐?” 그래서 바울은 단호히 말합니다.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바울은 구원 받은 우리가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3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입니다(2절).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죄에 대하여 죽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대하여 어떻게 죽을 수 있나요? 십자가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죄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렇게 죽음으로 죄 값을 지불했는데 다시 죄의 자리로 돌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죠. 그것은 마치 목숨을 걸고 탈북을 해서 브로커에게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남한에 온 탈북자가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고 하는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목숨으로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얻은 삶을 그렇게 허무하게 포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구원은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서 값을 지불하고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의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시금 죄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와 연합하였기 때문입니다(3-6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침례를 가지고 우리가 죄 가운데 돌아갈 수 없는 이유에 대하여 설명합니다. 침례란 물에 잠기면서 예수와 함께 죽고, 물에서 올라오면서 예수와 함께 산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즉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임을 선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렇게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이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곧 나의 사건이고, 예수님의 부활의 사건이 곧 나의 부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늘 사는 것은 예수와 함께 사는 것입니다(갈2:20). 그리스도와 연합했다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는 것인데 주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우리가 죄의 자리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고전3:16).
셋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입니다(7절). 본문 6절에 바울은 “우리가 다시는 죄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하며, 7절에는 “죽은 사람은 이미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합니다. 죄는 욕구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이상하게 죄를 지을 때는 죄를 짓고 싶은 욕구가 생깁니다. 마치 당뇨병 환자가 더 단 것을 먹고 싶어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 중독이 됩니다. 죄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구원 사건은 우리에게 이런 죄의 욕망을 끊어버린 사건입니다. 죄가 우리를 억누르지 못하도록 끊어냈습니다. 그럼에도 구원 받은 우리가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은 죄의 습관 때문입니다. 죄의 습관을 이겨내면 죄의 자리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첫째, 죄가 나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세요(12절). 죄가 나를 유혹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시고 죄와 맞서 싸우시기 바랍니다(히12:4). 둘째, 내 자신을 의의 도구로 헌신하세요(13절). 여기서 말한 도구란 ‘의의 연장’이며, 다른 말로 ‘의의 무기’입니다. 죄와 대항하여 싸우는 의의 무기가 되세요. 셋째, 은혜 아래 머무르세요(14절). 죄와 싸워 이기려면 은혜의 공급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자리가 아닌 은혜의 자리에 거하여야 합니다.
목장 나눔 질문: 구원을 얻고 나서 변화된 죄의 습관이 있습니까? 은혜의 자리에 거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