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과 희생
창세기 44장 17-34절
32어른의 종인 제가 소인의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안전하게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책임을 지고 나섰습니다. 만일 이 아이를 아버지에게 다시 데리고 돌아가지 못하면, 소인이 아버지 앞에서 평생 그 죄를 달게 받겠다고 다짐하고 왔습니다. 33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창44:32-33)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 책임을 다하고, 자녀는 자녀로서 책임을 다할 때 가족은 행복해 집니다. 국가의 위정자는 위정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국민은 국민으로서 책임을 다할 때 부강한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떨까요?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목회자가 목회자로서 책임을 다하고, 성도가 성도로서의 책임을 다하면 교회는 늘 건강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교회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우리가 서로를 불신하고, 갈등하는 이유는 서로가 책임을 회피하며,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권리는 주장하지만 책임은 다하려고 하지 않을 때 그 공동체는 흔들리고 넘어지기 마련입니다.
다시 이집트의 총리 앞에선 요셉의 형제들은 지금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닥트렸습니다. 잔치를 베풀고, 양식을 가득 담아주며, 호의를 베풀었던 총리의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스로는 이 일에 결백하지만, 눈 앞에 닥쳐 있는 상황은 꼼짝 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나왔기 때문에 어떤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총리인 요셉은 베냐민만 노예로 남겨 놓고 너희들을 모두 돌아가도 좋다고 판결을 내립니다. 나름 나쁘지 않은 판결이었습니다. 한 명만 희생하면 모두가 살수 있는 판결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셉의 형제들에게는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판결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을 잃고 너무나 슬퍼했던 아버지 야곱이 이제 베냐민 마저 잃어버린다면 슬픔을 견디기 못하고 죽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두가 난감해 할 때 유다가 총리 앞에 나섭니다. 유다는 형제들 가운데 4번째 아들입니다. 그는 장남도 아니었고, 그 위에는 형들이 3명이나 있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있어도 누구 하나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총리 앞으로 나갑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데려가지 않으면 아버지 야곱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자기들의 사정을 소상히 아룁니다. 그러면서 32절에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소인의 아버지에게 그 아이를 안전하게 다시 데리고 오겠다는 책임을 지고 나섰습니다.”(32) 실제로 그는 아버지 야곱에게 베냐민을 책임 지겠다고 약속을 하고 길을 떠나 이곳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할 상황에 처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러니, 저 아이 대신에 소인을 주인 어른의 종으로 삼아 여기에 머물러 있게 해주시고, 저 아이는 그의 형들과 함께 돌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33)라고 탄원합니다.
아버지와의 약속에 대헤 책임을 질 수 있도록 베냐민과 형제들을 보내주고 자신을 이 곳에 종으로 남게 해 달라는 유다의 고백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아버지와의 약속에 대한 책임감과 형제들을 위한 희생의 자세, 그래서 였을까요? 우리는 그의 모습에서 장차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사랑을 엿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의 책임을 감당하시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를 선택하시고, 당신의 물과 피를 흘려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책임과 희생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유다의 모습을 통해 책임을 다하는 성도의 삶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사명에 대한 책임을 다하고 있습니까? 그 사명의 책임을 다하기 위하여 오늘 내가 희생하고 헌신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모두가 편안하고 안락하고, 신앙을 즐기려고만 할 때,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과 책임을 다하는 제자 된 그리스도인으로 서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