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가려져 보지 못한 사람들
누가복음 24장 13-16절
13마침 그 날에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한 삼십 리 떨어져 있는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15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두명의 제자들이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몇일 전에 있었던 십자가 사건과 여인들이 전해준 부활의 소식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걸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사람들, 우리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압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대하여, 부활에 대하여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누군가와 예수님에 대하여 토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은 정작 보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토론의 대상이 아닙니다. 부활 사건은 2000년 전에 있었던 전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1차적 원인은 예수님이 신비한 몸으로 부활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즉 이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부활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좀더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이 눈이 가려져서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의 눈은 무엇으로 가려졌을까요?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한다는 편견으로 가려졌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었으나 그 소식을 믿지 못하고, 부활의 약속을 들었으나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불신으로 가려졌습니다. 그들의 신앙은 늘 자신들이 이해하는 한도 내에서 믿는 것이어서, 이성의 차원을 뛰어넘는 부활 사건은 알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편견과 불신, 그리고 상식적인 믿음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오늘도 우리가 눈 열어 믿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기도
주님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토론하면서도 정작 자신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모습에서 부족한 종의 모습을 봅니다. 주님에 대하여 설교하고, 주님에 대하여 가르치지만,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오늘도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믿음의 눈으로 주를 보게 하옵소서. 아멘